2017년 2월 28일 화요일
[스압] 3.1운동 민족대표와 일본 고등계 형사
▲고종황제 붕어
한반도가 주권을 잃고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한지 14년.
그리고 마침내는 국권을 잃고 식민지가 된 지 어언 8년.
1919년 1월. 망국의 실질적인 마지막 황제 고종이 죽었다.
조선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이면서도 반대로 독립운동의 마지막 억제제이기도 했던 고종이 사라지면서, 10년 전인 1909년 일본이 진행한 남한 대토벌 작전 이후 국내에서 사실상 괴멸된 대일항쟁의 불씨는 이제 방아쇠만 당기면 너나할 것 없이 튀어오를 듯 조선팔도의 민심은 격양되고 있었다.
▲파리 강화 회의
한편 유럽대륙을 격랑에 빠트린 세계 제 1차대전은 미합중국이라는 최종보스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해 버리면서 종결되었는데, 1919년 1월 1차대전 전후처리를 위해 벌어진 '파리 강화협상'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월슨이 패전국을 찢어놓기 위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조선의 지식인들을 흥분시켰다.
▲ 소련의 국가수반 블라디미르 레닌(좌)과 미합중국 대통령 우드로 월슨(우)
세계적인 두 대국의 지도자들, 미국의 우드로 월슨 그리고 소련의 블라디미르 레닌이 모두 자기 민족의 운명은 자기가 결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김병조, 오세창, 양한묵, 한용운. 김병조...
천도교, 대종교, 기독교, 불교 등 각 종교의 유력자들이 모두 모인 '민족대표 33인'은 일제에 대한 대대적인 항의시위를 준비하는 한편 세계에 이를 알려 각 강대국들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발빠르게 움직였다.
주요 강대국들은 승전국 일본(일본은 1차대전 승전국)의 영토에는 관여할 생각이 요만큼도 없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통탄할 만한 일이지만, 조선반도는 희망에 차 있었다.
▲최린, 젊은시절.
자. 여기 대한제국 하급 관리 출신이자 황실 특파 유학생으로 일본의 메이지 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유망한 인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최린. 천도교의 유력자이자 33세의 나이로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안창호의 신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을 정도로 명망높은 사람으로써 민족대표의 하나로 추대된 사람.
그리고 그는 지금 일생 최대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기미독립선언서를 몰래 인쇄하던 천도교의 인쇄소에 일본 제국의 고등계 형사 신철이 들이닥쳐 독립선언문 사본을 압수하여 갔기 때문이다. 유래없이 좋은 기회에 유래없이 많은 민중이 참여하는 조선 최대의 항일운동이 될 기미년 3.1운동을 총독부가 미리 낌새를 챈 것이 틀림없었다.
▲고등계 형사 드라마 이미지
고등계 형사 신철은 한반도의 주인이 일제로 바뀌었을 때 재빠르게 낌새를 채고 자기 보신을 챙긴 민족의 배신자로 악명이 높았다. 그리고 그의 손에 독립선언서가 넘어간 이상 일시와 장소가 총독부 경찰에 넘어가는 것은 너무도 뻔한 것이었다.
최린은 마지막 수단을 써야 했다. 돈과 권력 앞에 민족의 양심을 팔아넘긴 인물이라면, 권력은 주지 못하더라도 돈으로 그의 입을 다물릴 수는 있을 것이었다. 바로 매수였다.
"신철. 당신은 망국 조선제국의 백성입니까, 아니면 일본제국의 신민입니까?"
신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최린은 다짜고짜 의미 모를 질문을 했다.
그는 어리둥절했으나 대답을 피하지는 않았다.
"글쎄, 이전에는 고종황제의 백성이었지만 지금은 일본천황의 백성이지. 그것이 다를 것이 있는가?"
어디까지나 일본의 형사라고 선을 긋는 신철을 보며 최린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다면 일본 황제의 신민, 조선총독부 고등계 형사분께 제가 청탁이 하나 있습니다. 대가는 섭섭치 않게 드리겠으니 여길 보아 주시지요."
최린이 가져온 돈은 자그마치 5천원이었다. 당시의 쌀 한 가마 가격이 40원이었는데, 요새 쌀 한가마니에 약 15~20만원 선이니, 쌀 125가마라면 요새 돈으로 약 2500만의 거금이다. 그리고 당시와 지금 쌀이 가지는 위상을 고려하면 저 돈은 최소 4천만원이 넘는 엄청난 돈인 것이었다.
"그래, 최린 선생이 내게 하고자 하는 부탁이 뭡니까?"
돈을 보자 안색이 달라지는구나. 최린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말하고자 하는 바에 운을 틔웠다.
"얼마 전 선생이 단속하신 인쇄소에서 불온분자로 추정되는 문건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 제 친지와 연관된 터라, 이번 한 번만 봐 주시면 어떨까 하고..."
"아, 그것 말이오."
그리고 신철의 눈빛이 변했다.
"물론 알고 있소. 그리고 최린 선생이 하는 청탁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시다면 얘기가 빠르겠군요. 허면..."
"선생, 나는 알고 있소. 선생이 계획하는 것, 하고자 하는 일을 대충 눈치챘단 말이오. 물론 자세히는 모르오. 하지만 낌새는 알아차렸지."
당혹해 하는 최린의 눈앞에 신철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나는 상부에 이 사실을 보고하지는 않을 셈이오."
"그것은, 신철 선생"
"나 역시 조선인이오. 물론 나는 일본 제국의 고등계 형사입니다. 하지만 말이오, 나 역시 조선인이란 말입니다."
너무 갑작스런 신철의 행동에 할 말을 잃은 최린의 앞, 신철은 길게 읍을 하고 뒤돌아 방을 나섰다.
신철을 아직 믿지 못한 최린이었지만, 그가 정말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는지 다행히 거사는 성공적으로 치뤄질 수 있었다.
'우리들은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태극기가 조선 팔도 3천리를 모두 뒤덮었다. 쏟아져나온 태극기는 곧 일제에 대한 무장운동으로 바뀌기도 했다.
청춘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그러면서도 자주적인 조선민족은 더 이상 남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는 한마음이 되어 일제의 지배를 몰아내려 했다.
비록 운동 자체는 조선의 주인이 일제라는 점을 바꾸지 못하고 1여년 만에 진압되었고, 이후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시작된 문화통치는 조선의 독립의지를 점점 와해시킴과 동시에 많은 지식인들이 변절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3.1운동의 여파는 인도, 대만 등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가 독립운동이 벌어졌고, 중국인들이 조선을 보는 시각이 상당히 달라지기도 했다.
또한 세계에 '조선은 일제 지배를 거부한다'는 확고한 메세지를 전하였기에 이후 이승만과 장제스가 미국 정부에게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워싱턴 포스트에 보도된 한국의 3.1운동 소식. 기사제목은
Ninety-eight women slain in wholesale executions, as japan holds korea in slavery with gun and bayonet
일본이 총과 총검으로 지배하고 있는 한국에서, 98명의 여성이 대량 처형에서 죽임당하였다.
만일 신철이 그 사실을 미리 총독부에 보고하고, 요소요소마다 미리 헌병 병력을 배치하여 민중 집결을 차단하는 동시에 33인을 사전에 구속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움직였을까?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옥에 들어가기 전 신철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최린이 들은 것은,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만주로 출장을 갔던 신철이 행방불명 되었고,
상부에 허위보고를 한 죄로 일본 제국의 체포망이 좁혀오자 지니고 다니던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결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렀다....시간은 강철 같던 의지도 꺾이고 지키고자 했던 것의 의미도 잃게 한다.
여기,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하게 변절한 자들 세 명이 있다.
박희도. 정춘수. 그리고 '최린'이다.
3.1운동으로 인해 3년형을 복역한 뒤 약 10년 뒤, 최린은 돌연 대동방주의를 내세우며 일본 제국의 은혜를 말하는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명망 높았고 촉망받았던 조선의 인재는 이렇게 친일파가 되어 천황 폐하에게의 충성을 독려하는 일본의 지식인으로 변절하였다.
그리고 총독부 어용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을 역임하며, 그렇게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며 정계에 입성한, '가야마 린'의 인생 제 2막이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1945년. 조선, 중국, 동남아, 그것도 모자라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뻗어가던 일본 제국의 광기는 미합중국의 원자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작렬하면서 마침내 종식되었다. 조선은 마침내 일본제국의 치하에서 독립하였으며, 일본의 편에서 동포를 착취하였던 이들은 반민특위의 재판 아래서 그 죄값을 치러야 했다.
▲반민특위에 연행되어가는 최린.
반민특위 재판에서 최린은 자신의 죄상을 낱낱히 고한다.
공판장에 같이 있던 춘원 이광수가 '나는 조선 민족을 위하여 일본에 충성하였고 그것이 잘못이라면 민족을 생각한 것이 잘못인가' 라는 말에 '그 입 닥쳐라' 하며 일갈하기도 했다. 최린 그는 눈물을 흘리며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 잠시 민족 독립에 몸담았던 내가 이곳에 와서 반민족 행위를 재판을 받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소에 사지를 묶고 형을 집행해 달라. 그래서 민족에 본보기로 보여야 한다." 며 길게 읍을 하였다.
반민특위 공판장에서 선 그의 눈에 겹쳐보인 것은 무엇이었을까.
기미년 찬란히도 전국 방방곡곡을 뒤덮었던 흰색 태극기의 행렬?
일제에 항거하여 태극기를 휘날리다 총을 맞고 죽어간 청춘들의 피?
아니면 출소 이후 잘못된 선택을 내리던 자신에 대한 회한?
어쩌면 그 옛날 26년 전 42살의 최린이 보았던 일본 고등계 형사의 두루마리 자락이 아니었을까.
최후의 순간에 최소한의 민족적 양심을 지켰던 사람의 마지막 모습 말이다.
+잡설.
민족대표 33인은 최대한 많은 국내외의 인사들을 포섭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는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이완용 역시 그 리스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방정환의 장인으로도 유명한 손병희 선생이 바로 이완용을 포섭하러 찾아간 인물이었다. 당연하게도 그가 3.1운동에 참여했다거나 지지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3.1운동이 발발하자마자 조선인들의 자중을 요구하는 선언서를 써내린 인물이었지만, 이완용의 발언을 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다.
▲리노우에 칸요우(이완용)
“내가 이제 와서 이런 일에 참여함은 무안한 일이며 / 이 일이 잘 되면 먼 동네 사람을 기다릴 것도 없이 이웃에게 맞아 죽을 것이외다.
그러나 이번 운동이 성공해서 내가 맞아 죽게 된다면 차라리 다행한 일이겠소. ”
구한말 최고의 수재, 대한제국 전 내각총리대신, 그러나 대한제국을 일제에 넘긴 민족의 반역자.
그런 이완용이 말이다.
우리 민족에게 3.1운동이 가지는 의의는 무엇일까?
사실 옛날부터 유명한 이야기기는 한데, 모르는 게이들 있을까봐 한번 길게 써 봤다.
지루했다면 미안하다.
2017년 2월 13일 월요일
결혼왕 유퉁에 대해 araboza
7번 결혼한 사나이 유퉁의 결혼이야기를 알아보자 . araboza
유퉁 아저씨는 배우이자 국밥집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사업가이기도 하다.
7범 결혼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도록 하자
(본문은 http://blog.naver.com/jwsh88/30164459475 펌)
첫번째 부인과는 3번 결혼하였다. 서로 결별과 결합을 반복했다고 한다.
행사에서 처음 본 연예인 지망생한테 쌍욕 날리고 비구니 만든 다음에
찾아가서 꼬시고 동거하는 클라스 ㅍㅌㅊ?
여자는 한마디도 안하다가 3년 묵언 수행 끝나고 결별 선언함
세번째 부인
무당한테 어느날 어디서 처음 본 여자랑 인연을 맺게 될 거라는 말 듣고
그 말대로 처음 본 여자한테 프로포즈함 로맨틱가이 ㅍㅌㅊ?
20살 차이 극복하고 결혼했으나 이혼함
네번째 부인은 몽골인
29살 연하 ㅆㅅㅌㅊ 그러나 장모와의 갈등으로 이별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섯번째 부인도 몽골여인이다. 아내가 15살 때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분이 4번째 부인
이분이 다섯번째 부인이다.
비하인드 스토리가 무슨 삼국지 장수 스토리 같
유퉁 아저씨
결혼 많이 하는 것도 좋지만~
이젠 건강도 챙기세요~~
출처: <http://www.ilbe.com/717392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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